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쓰시마 해전 (문단 편집) == 해전 이후 ==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에 따르면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강대국 체제에서 이탈했다.''' 러시아는 그토록 자부하던 최강의 발트함대가 괴멸에 이르자 사실상 전역의 전투수행능력을 상실한 것이었고, 그 니콜라이 2세조차 사할린이 점령당하기 직전 종전조약을 맺으라고 각 관료들에게 재촉할 정도였으니 이를 보더라도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에게 차관받은 재원도 전비로 모조리 소모하였고, 사실상 만주는 일본의 소유권으로 넘어갔으며 기존의 주요 전략인 시베리아 철도로 물자를 수송하려는 계획은 일본의 간헐적인 게릴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엔 민중소요가 일어나 내부통제조차 안 되던 상황이었으며 러시아의 내로라하는 해군 명장들은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총체적 난국. 즉슨, '''육-해 전역의 연전연패로 인해 제정러시아의 만기를 친재하는 니콜라이 2세는 사실상 패배를 시인'''하였다. 일본 역시 전쟁을 더 지속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신흥국으로서 무리한 전쟁 준비를 하여 일본의 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음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수송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병력이 죄다 소모된 상태였으며 공장은 파산 직전, 만약 일본이 이 해전에서 졌다면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 입장에서는 전쟁을 더 지속해봤자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이득도 딱히 없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소멸시킨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여기서 전쟁을 더 지속해봤자 사할린이나 시베리아 지역 정도나 찔러보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영토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러시아라는 국가의 주축은 유럽 지역이었으며 러시아가 그 먼 길을 힘들게 원정온 것이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던 만큼, 일본도 러시아 유럽 본토를 침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했던 것은 분명한 우위였으므로, 휴전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휴전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타결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의 배상금 등을 무는 상황은 피했지만, '''동북아시아에서의 이권을 상당부분 일본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남사할린]]도 할양해야 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해버린 러시아는 추가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것 역시 묵인'''하게 된다. 장기적 국면으로 봐서도 러시아에게는 이 해전의 결과가 쓰라린 상처가 되었으며 일본에게는 상당한 득이 되었다. 발트 함대를 잃어버린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앞마당인 발트해를 독일 해군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해야 했다. 다만 러시아 발트함대 소멸은 영국이 오랜 경쟁자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계기가 되었고(러시아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삭제되었다) 이로 인해 [[그레이트 게임]]은 사실상 종결, 영국은 독일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해군력 소멸은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허약한 독일 [[크릭스마리네]]에게 [[소련 해군]]은 제대로 된 교전을 시도해보지 못하고 [[잠수함]]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수상함대 전력은 1950년대쯤이나 가서야 회복되었다. 반면 일본은 동북아에서 세력을 확대했으며 국제적인 위상 역시 일신하게 된다. 전쟁 이전까지는 저평가 받던 위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서구 열강에 맞먹는 군사력을 지닌 신흥 열강으로 대접받기 시작하며 국제적인 발언력 역시 강해진다. 일본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실감했으며 이후 [[제1 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럽이 주춤하는 동안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본다.이후 유럽 열강은 1921년부터 맺어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을 포함시켜 일본의 해군력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까지 펼쳐지게 된다. 한편 영국 해군의 제1 해군경(first sea lord)[* 군경, 해군경이란 용어는 영국의 영어로 된 관직명을 일본인이 번역하며 만든 것으로, 서구를 따라하던 일본에 있던 관직명이기도 하다. 한자로 씌어 있지만 엄연히 일본어다. 그것이 과거에 그랬고 요즘도 생각없이 잘 하듯, 그냥 한국어 한자발음대로 읽어 국어처럼 적는 바람에 한국어 문서에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냥 해군참모총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존 피셔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요인을 전투함의 빠른 속도와 거포의 화력과 사거리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에 주안점을 둔 새로운 함정을 요구한다. 영국 해군은 1905년부터 [[드레드노트(전함)|HMS Dreadnought]]을 건조하여 1906년에 취역시켰으며 이는 [[드레드노트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함들을 탄생시켜 기존의 전함들을 도태시키고 건함 경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게 된다. 그리고 일본 해군에게 이 해전은 다른 의미로 나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해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은 자기 힘을 과신하여 한층 공격적이고 모험주의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영국의 사학자 제프리 리건(Geoffrey Regan)에 따르면: >...created a legend that was to haunt Japan's leaders for forty years. A British admiral once said, 'It takes three years to build a ship, but 300 years to build a tradition.' Japan thought that the victory had completed this task in a matter of a few years ... It had all been too easy. Looking at Tōgō's victory over one of the world's great powers convinced some Japanese military men that with more ships, and bigger and better ones, similar victories could be won throughout the Pacific. Perhaps no power could resist the Japanese navy, not even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 >(쓰시마 해전의 압승은) 이후 40년간 일본 지도부를 사로잡은 신화를 창조했다. 어느 영국 제독[*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Andrew Browne Cunningham, 1st Viscount Cunningham of Hyndhope, 1883~1963)을 가리킨다. 다만 커닝엄은 생몰연대에서 볼 수 있듯이 2차대전 당시 활약한 군인이다.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 추축국의 해군에 맞서 여러 번 승리했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를 건조하는데는 3년이 걸리지만, (군사적) 전통을 형성하려면 300년이 걸린다. 일본은 쓰시마 해전 승리를 통해 이 과업을 단 몇년만에 완수했다고 믿게 되었다. (중략) 모든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세계 열강 중 하나를 상대로 도고가 거둔 승리를 관찰한 일부 일본 군인들은 더 크고 더 좋은 배를 더 많이 건조하여 태평양에서도 비슷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어느 열강도, 심지어 영국과 미국도 일본 해군에 맞설 수는 없을 터였다. >---- >Regan, Geoffrey (1992). "The Battle of Tsushima 1905". The Guinness Book of Decisive Battles. p. 178. Guinness Publishing. 또한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 전체의 승기를 가져온 경험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후로도 함대의 단기 결전에 집중하는 '''[[함대결전사상]]'''에 푹 빠지게 된다. 또한 함대결전사상에 비해선 사소해 보이지만 일본 해군의 다른 병폐도 이 때부터 시작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기함]]인 [[미카사]]에 탑승해서 직접 선두에서 일선 지휘를 맡은 것이 신화처럼 자리잡아서, 이후 일본 해군에선 소규모 전대장 뿐만 아니라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같은 최고위 사령관도 직접 기함에 탑승해서 일선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전통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해전의 양상이 점차 바뀌면서 최고위 지휘관이 기함에서 지휘하는 건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지휘통신 및 지휘를 위한 전문 설비와 인원이 충분히 갖추어진 지상 기지에 비하면 일개 함선인 기함은 당연히 설비와 인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함이 교전에 휘말려서 자칫 최고 지휘부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좋은 예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 태평양함대의 최고 지휘관인 [[체스터 니미츠]]는 하와이의 태평양함대 본부에서 총지휘를 하고 해전의 일선 지휘는 현장에 있는 프랭크 플래처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임무를 분담했다. 반면 2차대전기의 일본 해군은 선두 지휘라는 구세대적 전통과 수뇌부의 관료제 및 보신주의가 맞물려 이중의 병폐를 낳게 되는데, 선두지휘시 사령부의 생존성을 위해 [[기함]]으로 주어지는 [[야마토급 전함|가장 크고 튼튼한 전함]]이 활약할 장소를 잃고 후방에서 사령부의 호텔 노릇이나 하는 잉여가 되고, 정작 사령부는 실전에 참여하지도 않는 바람에 진주만, 미드웨이, 과달카날, 레이테 등 굵직한 함대결전 및 전역에서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일선부대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수송기로 이동 중 격추되자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 고가 미네이치는 선두지휘라는 명목조차 내팽개치고 지상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이는 일선부대의 사기 저하 및 명령 전달체계 악화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